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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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걸음 한 발짝 두 발짝]
도서관 문이 낮아지다

박경희 | 2018년 01월

결혼과 육아 문제로 퇴직한 지가 오래전이다.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내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5년이란 경력 단절을 뛰어넘고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된 지가 8년째로 접어든다.

내가 처음 도서관을 만난 것은 반세기 전쯤 중학교에 진학해 새 학기를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남산 국립도서관이었다. 학생증을 보여 준 뒤 도서관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분위기가 조용하다 못해 엄숙했다. 내 발걸음 소리가 주변 사람에게 방해될까 조심스러워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하게 걸었다. 그만큼 도서관은 조심스런 곳이었다. 그렇게 공부하다 잠시 밖으로 나와 주변을 거닐면 산 아래 서울역이 한눈에 보였다.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이다음에 여행을 많이 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 보곤 했다.

도서관을 오르는 길옆에, 진달래, 철쭉, 개나리가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핀 모습에 자꾸만 「봄의 교향악」 노랫말이 입안을 맴돌곤 했다. 같이 가던 친구는 ‘봄의 교향악이 남산 주변에 가득 펼쳐졌다’는 표현에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였다. 주로 남산 국립도서관과 4·19 도서관을 이용했던 것은 무료입장이라는 이유에서다. 당시는 지금처럼 지역마다 도서관이 있는 게 아니어서 도서관에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서관에 가득한 책들을 보며 직원은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많이 달라진 지금이다. 이제 그렇게 부러워하던 도서관에 근무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앞일이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노력으로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오전 9시, 개관 시간보다 일찍 줄 서서 기다리는 이용자들의 가슴에 저마다 열정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도 힘내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용자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응원을 건넨다. 그동안 이용자들을 응대하다 보니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지레짐작으로 알아챌 수 있다. 도서명 대신 내용을 말하며 책을 찾더라도 원하는 책을 찾아 주면 활짝 웃음을 보인다. 그 웃음이 도화선이 되어 내 마음도 순간 밝아 온다.

우리 도서관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와 초·중·고등학교에 대학교까지 있어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민이 많은 편이다. 유아 자료실부터 어린이 자료실 성인 자료실까지 층별로 구분되어 있어 이용자가 쉽게 도서에 접근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임산부를 위한 내 생애 첫 도서’라는 프로그램도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맞춤 도서 정보를 집에서 클릭 한 번으로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어린이 독서교육 관련 자격 취득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교육 후 자격증 취득과 더불어 재능 기부를 통하여 사회생활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는 상상이나 했을까?

어린이들은 저마다 꽃봉오리를 품고 있음이다. 어디로 뻗어 나갈지 알 수 없는 귀하고 향기로운 미래의 꽃들이다. 부모님 손을 잡고 유아기 때부터 도서관과 친숙한 관계를 형성한다. 알 수 없는 옹알이로 반갑다며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보호자들에게 독서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 내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소통한다. 유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자 쪼그리고 앉아 유아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유아가 되어 그들의 소리에 호응한다. 그림책을 펼쳐 든 아기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열어 준다.

유아에서 아동기, 학동기로 들어서면 학교와 연계하여 독립된 서가에 필독서가 비치되어 손쉽게 책을 찾을 수 있다. 도서관은 독립됨이 아니라 학교와 가정, 그리고 도서관이 서로 연계되어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22만여 권의 비치된 도서 중에서 어린이 자료실에 할당된 도서의 비중은 27%인데, 결코 적지 않다. 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연중 프로그램이 실시됨은 물론 어린이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족 공부방과 가족 영화방도 마련되어 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방문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스스로 방문하는 어린이도 상당한 편이다. 책을 통하여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기에 도서관은 가족과 학교와 아이 모두와 소통하며 함께 상생하는 관계의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도서관 주변에 진달래와 철쭉, 개나리가 흐드러진, 신학기 무렵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내게 다가오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선생님! 책 한 권만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쑥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적절한 도서를 선정해야 하나 추측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책을 보려는 대상이 어머님이세요? 아니면?” “제 아들이 읽게 하려고요.” “아드님이 중학생일 것 같은데 맞나요?” 모범생 아들이었단다. 하필 입학하자마자 이사해서 전학을 갔는데 얼마 안 있어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말수도 적어지고 아예 방문을 닫아 버렸단다. 어떻게 아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걱정하며 좋은 책이라도 읽게 하려고 도서관을 찾아오게 되었다 한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내 아이라면? 분명 교육적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편하게 보고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어머니, 절대로 아드님에게 보라고 강요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아드님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딱 한마디만 하셨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너를 믿어, 많이 힘들지? 네 모든 것을 사랑해! 아들아!” 하고요. 그랬더니 친정 엄마, 친언니 같다며 눈물을 보였다. 자녀를 기르는 모든 어머님의 마음이리라. 내 아이도 사춘기를 보낼 때 얼마나 조심스러웠던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콧등이 찡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난 뒤 책을 반납하면서 또 책 추천을 원했다. 근황을 들어 보니 아들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좋아했다. 그 후 몇 번 더 도서를 대출하고 반납한 후 한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아들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방문해서 인사를 건넸다. 늪을 잘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자 내 일처럼 기뻤고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어 감사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들고 나는 모두의 도서관이다. 분류된 자료실마다 분위기도 따로따로이다. 유아 자료실에는 희망과 행복, 웃음이 팡팡 피어나고 어린이 자료실에서는 아이들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총총걸음에 통통통 요란스러운 뜀박질 소리가 들리지만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중·고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부산스러운 시험 기간, 도서관 전체가 들썩거리며 북적거리는 방학 기간. 조금 소란스럽지만, 학생들이 공부하려고 도서관을 찾으니 좋게만 보인다. 조금 정숙하면 더 좋겠지만, 무리 지어 다니며 가랑잎 지나는 것에도 까르르 웃어 대는 사춘기니 어쩌랴. 성인 자료실에는 조용조용 조심스러운 분위기에 공부하는 청년이나, 중장년들의 어깨가 매우 무거워 보인다. 요술 방망이라도 있다면 슬쩍슬쩍 그들의 힘겨움을 덜어내고 싶다.

이제 도서관은 도서 대출과 반납뿐만 아니라 이용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며 상담자의 역할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간순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에 설명해야 하고. 놀이터인양 서가 사이를 쿵쾅거리며 뜀박질하는 아이들에게 왜 질서를 지켜야 하는지 지도하며 나와 이웃의 관계를 쉽게 알려 주기도 한다. 안전한 환경이라지만 순간 넘어져 사고가 나기도, 속상한 마음에 억지 구실과 이유를 대며 화를 내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와 반대로 수고한다며 방문할 때마다 환한 미소를 건네는 분들도 많다. 퇴직 후 오갈 데 없는 자신에게 늘 환영해 주는 도서관이 좋다고 ‘내손도서관 예찬’이라는 감사 쪽지를 건네는 사람,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줘서 감사하다는 이용자도 있다. 더러는 자신이 걸어온 얘기를 들어 주기를,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기를, 삶에 지쳐 있음을 보아 주기를, 절망에서 위로 받기를, 건네는 말 속에서 알아채곤 짧은 시간이나마 들어 주기도 한다.

도서관은 오래전 모습과는 많이 변화된, 이웃에게 열려 있는 낮은 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제는 공공도서관들을 주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역 모든 이의 도서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동서고금 역사 속을 드나들며 지구의 정보를 열어가는 공간임을, 책 속에 길이 있음을 확신한다.
박경희 | 2005년 『월간문학』에 수필로, 2012년에는 『월간 문학세계』에 동화로 등단하였습니다. 그림책 교육 지도사, 동화구연 지도사, 독서지도사로 활동하며, 현재 의왕시 내손도서관 어린이글마루에 근무 중입니다.